수영금지구역에서 몰래 놀다가 누군가에게 걸려서 달아나는 익살스런 순간을 포착한 그림입니다.

이 소년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수영금지구역에서 수영을하다가  걸려서  달아나는 그림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인물이 두명뿐입니다.친구 한명이 이 세상에 더이상 살고있지 않은거죠.

아래 강아지도 나이든 개가 되어서 헐레벌떡 뛰고있고,..

익살스런 그림속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꼈었던 그림입니다.

 

제목 : MenRacing To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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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교의 자유  Freedom to Worship

 

2.발언의 자유  Freedom of Speech 

 

3.원하는 것으로부터 자유  Freedom from Want

 

4.공포로부터 자유  Freedom From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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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소와즈 부쉐Francois Boucher

마담 퐁파듀의 초상화로도 유명한 부쉐는 여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나 봅니다.

언제나 아름다운 그의 작품속의 여인들중에 약간은 귀족들의 뒷방을 들여다 볼수 있는 그림은 흔하지 않은데요.

 

La Toillette

이작품은 그래도 쪼금은 현실적인 브루조아의 생활이 묘사되있지 않나 싶네요. 그당시 최고의 유행이었던 애교점을 오서방의 그것만큼 크게 그리고 그녀는 가터 스타킹을 동여 맵니다.

고상한 포즈는 온데 간데 없고 애라 모르겠다 치마 훌러덩 뒤집고 스타킹부터 끌어 올립니다.

에혀..이제야 좀 살겠네.. 내방처럼 입어보고 탈락된 외출복들이 널부러져 있고 이리저리 고를

모자를 체크 합니다.

 

퐁파듀 부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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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그는 최고로 유명하고 부와 명성을 쌓았던 18세기 영국의 화가 입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는 언제나 전원적인 그림을 사랑했으며 풍경을 그릴때 가장 행복했으나 그의 대표작들은 귀족들의 초상화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인물을 그린다는것 자체를 아주 싫어 했는데 말이죠.

 

 

 

Mr,Mrs Andrews

 

평범한 부부의 초상화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초상화, 즉 세로 길이에 화려한 복식을 갖춰 입고 벨벳 커텐을 배경으로 중심부에 위치한 그런 류의 인물화와는 달리 인물은 좌측에 몰아져 있고 아름다운 시골경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똑똑한 귀족의  과시용 초상화 입니다. 시골임에도 부인은 갖 파우더룸에서 나온것처럼 뽀샤시 합니다.

미스터 앤드류씨는 취미가 사냥 이군요.

뒤에 그려진 끝없는 초원은 바로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임을 말해주고 있구요. 옆에 추수된 밀들은 그들이 아주 풍요로운 상태임을 암시합니다.

도심지에 사는 귀족이지만 시골에 적어도 몇만평의 땅은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귀족임을

중요시 여기는 영국귀족들의 재산자랑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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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
영국의 판화가, 화가로 그 천재성을 인정받고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 화가 입니다.
6개로 된 이야기 형식의 판화 할롯의 프로그레스(Halot's Progress)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 주는 귀중한 그림입니다.
그는 여러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작품을 다수 남겼는데 이 중 marrige a-la-mode는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그시절 파산을 막기위해 중인들과의 결혼을 승낙한 후  귀족작위를 팔고 돈으로 사돈을 �는 결혼 풍습을 풍자했습니다.

 

 

파산 직전에 이른 귀족은 어쩔수 없이 정숙하지 못한 중인의 딸과 결혼을 승낙하여 낙심한 모습을 보이고 포즈도 귀족의 위엄을 잃었군요.

좌측의 남성은 여인의 아버지인듯한데 주머니의 문서와 손에 들려 있는 돈으로 보아 이결혼은 돈으로 성사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삐에뜨로 롱기(Pietro Longhi)
로코코가 프랑스에서 붐을 일으킬 무렵에도 이탈리아의 예술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그러나 찾아 내자면 대표적인 화가가 삐에뜨로 롱기 인데요. 베니스의 윌리엄 호가스로 불리는 풍자에 강한 이 사람은 사치스럽고 희귀한 새로운 것을 찾아 유람하는 브루조아들을 베니스의 전통적인 마스크를 씌운 인물들로 표현합니다.
인물들이 모여있는곳은 바로 리도또(ridotto)라고 불리우는 파티 입니다. 가면을 쓰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른채 여흥을 즐깁니다. 보통 페스티발 전야에 춤과 노래가 가득차는 파티 입니다.
갓 아프리카에서 공수된 코뿔소를 보며 환호를 지르기도 하네요.

그당시 그들이 즐기던 리도또의 규모가 어느정도 였냐 하면.. 그당시 신문 기사 하나 담아왔습니다.
"1732년 6월 29일 목요일 하객들은 반도 차지 않았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겨우 203명정도가 와있었다
  남자들보다 여인네들이 훨씬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고용된 100명의 시종들은 정원을 삥 둘러 세워졌고  왕족들이 속속 등장했다.

파티는 최고의 조건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파티는 다음날 5시 까지 계속되었다."

 

 

 

 

쟝 오노어 프레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살아생전 400여점이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던 정열적인 그는 아름다운 여인이 숲속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The swing"으로 유명할겁니다.
 에로티시즘과 연인들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쾌락주의에 입각하여 표현을 하였지만 그는 네덜란드 화가(렘브란트, 베르미르등)의 천재적인 붓터치와 그림자 연구를 존경했고 이어가고자 노력했답니다.

또한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것인가, 왕의 취향인 향락적인 그림을 할것인가에 많은 고민을 했다는군요..
그러한 예술가로서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의 연인들은 바람에 묻어나오는 양귀비 향에 취한듯이 팔을 뻣고 몽롱한 웃음을 짓고 있네요.

 

 

 

프레고나르의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인 "그네"입니다. 올소 이 작품은 로코코의 작품 특성을 대변하는 대명사 격입니다. 그네를 즐기는

여인은 최신유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그녀의 연인에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날립니다. 연인은 그녀의 유혹에 흠뻑 취한채 장미로

만들어진 쿠션에서 감히 거부할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된듯합니다.

연인들의 행동하나하나가 드라마틱하게 해석되는것이 로코코 미술의 가장큰 매력적인 주제였답니다.

그녀가 획 날려버린 아담사이즈 구두가 유머러스합니다.

 

 

이그림은 사실상 거절당한 프레고나르의 작품중에 하나 입니다. 루이15세의 애첨 마담 듀바리를 위해 4부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역시 연인들의 밀고당기는 사랑싸움을 표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열정적인 애정공세가 그녀에게는 먹히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방법을 달리하여 달콤한 글로 가득한 편지로 그녀의 마음을 녹이려고 하는군요.

드디어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바친 그에게 여인은 사랑의 승리자라는 증표로 왕관을 씌워 줍니다...

 

ROCOCO....뻑적지근 파티 훔쳐보기

 

사치는 어느때나 있었지만 프랑스의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대혁명은 그 대표.

그저.. 혁명전야에 브루조아들이 도대체 어찌했기에.. 민중들의 분노를 샀는가..
베르사이유 궁전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쳐도.. 드라마처럼 줄줄이 요즘 강남 아줌마들 어찌 사는지
르뽀로 전해 주지 않는다면 속속들이 알기는 힘든법 아니겠습니까?
그저 서민들이야 그들 속에 끼지 못하니 그들을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 보며 대리만족 하다가 신세 한탄도 하지만..
그들의 리얼 라이프가 궁금하고 누려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수 없네요..ㅜㅜ

 

르네상스, 바로크,시대를 지나 여성스럽고, 섬세한 디테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스타일인 로코코은
여타 장르처럼 전 유럽으로 뻗어나갔다기 보다는 프랜치 스타일 이라 널리 불려졌고 영국이나 이탈리아에서 약간 유행했을뿐 화려한 명성에 비해서는 오래 가지도 않았고. 예술적인 가치도 높게 평가받지 못했다고 하네요.

요즘도 다른 장르의 그림들과 비교해서 소외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로코코 화풍의 특징은 귀족의 최신 패션을 화폭에 담는다던지,유흥을 즐기고 있는 귀족들. 그들의 영지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영주들의 그림들로 가득 합니다.

언제나 향락으로 넘쳐나던 18세기의 유럽은 이 화가들의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쟝 안토안 와토(Jean-Antoine Watteau)

와토 하면 로코코, 로코코 하면 와토의 그림이 대표적 입니다.
그는 화려한 귀족들의 야외 피크닉이나 파티들을 묘사하면서 패트 갈랑트(Fete galante)라는 장르를 만들었고, 이후 그의
스타일을 따르는 로코코 화가들에게 인기를 얻게 됩니다.
패트 갈랑트란 원래 귀족들이 야외에서 호화스러운 세트나 낙원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여흥을 즐기는 문화 인데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이러한 놀이를 즐기는 귀족들을 표현함으로써 그의 스타일도 동일하게 이름지어 집니다.
유흥과 쾌락을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그림은 유럽역사와 예술사에 귀중한 터닝 포인트를 만들게 됩니다.
바로 신과 왕족의 기준과 교회를 위한 예술이 장악했던 예술에서 조금씩 멀어져 개인의 즐거움과 취향을 화폭에 담게 되었다는 것이죠.

 

 

 

귀족들이 야외에 천국과 같은 세트를 만들어 놓고 사정없이 즐기고 있는 분위기를 잘 표현 했습니다.

설마 저 천사들이 출연 했었을까 의문이지만 그 스케일은 짐작이 가는군요.

에뚜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 풀밭위의 점심과 올랭피아


인상주의의 대부로 통하는 마네는 “그림은 그 자체로서 감상하고 즐기는 대상이 되어야지, 그것을 넘어 그 대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중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남겼다. 가령 올랭피아 같은 그림 속의 여인이 비너스인지 혹은 다른 어떤 여인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여자의 누드를 어떤 색채로 어떻게 표현했느냐, 그것이 보기에 아름다운가 라는 것이다.

 그림감상에 대한 마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 고전과 전통,보수적인 시각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마네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살롱전(공모전)에 자주낙선하고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권위와 보수에 빈번히 충돌하며 출품을 계속했던 그는 풀밭위의 점심,오랭피아등으로 낙선전에서 더욱 유명해졌고 주위에 젊은 화가들과 비평가들이 모여들어 인상파를 형성했다. 마네는 한 번도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그를 기려 프랑스의 문인 조르주 바티유는 “문자 그대로 현대적인 회화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 현대 회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마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마네와 도발적인 눈빛의 빅토린 뫼랑

 올랭피아와 풀밭위의 점심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1844~1927)이다. 마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여인에게 대뜸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싫으면 관두라지. 나에게는 빅토린이 있으니까”라고 했다는 바로 그 빅토린이다. 빅토린은 마네가 언제든지 동원할수 있는, 또 그의 어느 그림에나 유용한 그런 모델이었다.

마네가 빅토린을 만난 것은 1860년대초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였다.  그후 12년간 빅토린은 마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또한 매력적인 몸매를 지닌 그녀를 더욱 그녀답게 만드는 것은 뚫어질 듯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였다. 실제로 빅토린은 매우 강렬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에서 빅토린은 그림밖을 응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반항적으로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무정해 보이는 그런 시선이다. 머리카락도 적갈색이어서 이런 반항의 시선이 더욱 돋보인다. 마네의 그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빅토린의 이 타오르는 눈빛은  마네를 사로잡아 늘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게 한 그녀의 선천적인 매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모델로서뿐 아니라 화가로서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1876년 살롱전(일종의 공모전)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했고 (이해 마네는 낙선했다), 1879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는 마네와 같은 방에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인상파의 대부 -에뚜아르 마네

 프랑스 파리에서 법무부 고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는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기를 원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마네는 오히려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하는데, 입학시험에 2번이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50년에 T. 쿠튀르의 아틀리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위대한 색채화가에 대한 취향을 이어받고 하프톤을 배제하고 밝음과 어두움을 대담하게 대비하는 표현기법을 배우며 그곳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그 사이에 1853년 이탈리아를 여행, 1856년 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63년 낙선전(落選展)에 출품한 《풀밭에서의 점심》은 많은 비난을 샀고, 1865년의 살롱 출품작 《올랭피아》도 물의를 빚었다.  이 두 작품에는 나체의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 육체가 빈약한 평탄한 묘사법 때문에 좋지 않은 평을 받았고, 또 님프·비너스·오달리스크 같은 신화적·이국적 세계의 나부(裸婦)가 아닌 현실세계의 나부를 그렸다는 것이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와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현대의 도시적인 감수성을 선구적으로 표현했다. <스스로의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마네의 신조였으며, 1850년대 이후 친교를 맺은 시인 C.P. 보들레르의 <현대생활의 영웅성>에도 영향을 받았다.1882년 그동안의 공적이 인정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나 이 뒤늦은 인정에 냉소를 보내며 죽었다.

추천(화가와 모델: 이주헌 예담,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생각의나무)

 

 

올랭피아 1863   130.5× 19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순백의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화면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이 작품 역시 발표와 동시에 '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더한 비난과 사회적인 물의를 야기하였다.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의 누드란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여신의 이상화를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나체인 채 도발적인 자태의 창녀처럼 묘사되어진 이 작품으로 마네는 당시의 전통과 도덕적인 관념을 깨트리고 있는 반사회적인 작가로 취급받기까지 하였다.

 이 작품 속에는, 정면을 응시하며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올랭피아와 그녀에게로 배달되어진 듯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여자, 그리고 침대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가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자리하고 있다. 배달된 꽃다발을 전해주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흑인 여자의 표정과 마치 귀찮은 듯이 그 꽃을 외면하고 있는 올랭피아의 표정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시되자 평론가와 시인들의 혹평과 빗발치는 야유 때문에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천장 밑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델의 나체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며, 신화나 우의(寓意)의 베일을 씌우지 않고 거의 초상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들은 비너스 대신 모델이 된 거리의 여인을 보고 파리의 밤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고 격분하였던 것이다. 살결의 밝은 우윳빛이 또렷한 윤곽에 의해서 검은 배경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효과, 그 평면적 표현의 기법을 평론가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거꾸로 그가 제시한 표현 기법의 참신함과 근대적인 명쾌함을 일반에게 인상적으로 남겨 작가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하였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208× 264cm,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했다 떨어져 이른바 ‘낙선전’에 걸린 작품이다. 당시 어떤 작품보다 크게 주목을 받아 웬만한 입선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만큼 유명해진 낙선 작이다. 이 작품역시 “어떻게 성장(盛裝)을 한 신사들이 벌건 대낮에 야외에서 창부들과 놀아날 수 있느냐”며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그림속의 여인은 지금 완전히 벌거벗은 채 살짝 구부린 무릎위에 팔꿈치를 얹고 관객을 바라본다.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관객의 그것을 비껴가는 것과 대비된다. 그 만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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