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뚜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 풀밭위의 점심과 올랭피아


인상주의의 대부로 통하는 마네는 “그림은 그 자체로서 감상하고 즐기는 대상이 되어야지, 그것을 넘어 그 대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중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남겼다. 가령 올랭피아 같은 그림 속의 여인이 비너스인지 혹은 다른 어떤 여인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여자의 누드를 어떤 색채로 어떻게 표현했느냐, 그것이 보기에 아름다운가 라는 것이다.

 그림감상에 대한 마네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당시 고전과 전통,보수적인 시각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마네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살롱전(공모전)에 자주낙선하고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권위와 보수에 빈번히 충돌하며 출품을 계속했던 그는 풀밭위의 점심,오랭피아등으로 낙선전에서 더욱 유명해졌고 주위에 젊은 화가들과 비평가들이 모여들어 인상파를 형성했다. 마네는 한 번도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그를 기려 프랑스의 문인 조르주 바티유는 “문자 그대로 현대적인 회화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 현대 회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마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마네와 도발적인 눈빛의 빅토린 뫼랑

 올랭피아와 풀밭위의 점심의 모델은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1844~1927)이다. 마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여인에게 대뜸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싫으면 관두라지. 나에게는 빅토린이 있으니까”라고 했다는 바로 그 빅토린이다. 빅토린은 마네가 언제든지 동원할수 있는, 또 그의 어느 그림에나 유용한 그런 모델이었다.

마네가 빅토린을 만난 것은 1860년대초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였다.  그후 12년간 빅토린은 마네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또한 매력적인 몸매를 지닌 그녀를 더욱 그녀답게 만드는 것은 뚫어질 듯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였다. 실제로 빅토린은 매우 강렬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에서 빅토린은 그림밖을 응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반항적으로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무정해 보이는 그런 시선이다. 머리카락도 적갈색이어서 이런 반항의 시선이 더욱 돋보인다. 마네의 그림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빅토린의 이 타오르는 눈빛은  마네를 사로잡아 늘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게 한 그녀의 선천적인 매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모델로서뿐 아니라 화가로서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으며 1876년 살롱전(일종의 공모전)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했고 (이해 마네는 낙선했다), 1879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는 마네와 같은 방에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인상파의 대부 -에뚜아르 마네

 프랑스 파리에서 법무부 고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마네는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률가로 키우기를 원했다. 이러한 의견 차이 때문에 마네는 오히려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하는데, 입학시험에 2번이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50년에 T. 쿠튀르의 아틀리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위대한 색채화가에 대한 취향을 이어받고 하프톤을 배제하고 밝음과 어두움을 대담하게 대비하는 표현기법을 배우며 그곳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그 사이에 1853년 이탈리아를 여행, 1856년 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63년 낙선전(落選展)에 출품한 《풀밭에서의 점심》은 많은 비난을 샀고, 1865년의 살롱 출품작 《올랭피아》도 물의를 빚었다.  이 두 작품에는 나체의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 육체가 빈약한 평탄한 묘사법 때문에 좋지 않은 평을 받았고, 또 님프·비너스·오달리스크 같은 신화적·이국적 세계의 나부(裸婦)가 아닌 현실세계의 나부를 그렸다는 것이 비난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와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현대의 도시적인 감수성을 선구적으로 표현했다. <스스로의 시대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마네의 신조였으며, 1850년대 이후 친교를 맺은 시인 C.P. 보들레르의 <현대생활의 영웅성>에도 영향을 받았다.1882년 그동안의 공적이 인정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나 이 뒤늦은 인정에 냉소를 보내며 죽었다.

추천(화가와 모델: 이주헌 예담,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생각의나무)

 

 

올랭피아 1863   130.5× 19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순백의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화면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이 작품 역시 발표와 동시에 '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더한 비난과 사회적인 물의를 야기하였다.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의 누드란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여신의 이상화를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나체인 채 도발적인 자태의 창녀처럼 묘사되어진 이 작품으로 마네는 당시의 전통과 도덕적인 관념을 깨트리고 있는 반사회적인 작가로 취급받기까지 하였다.

 이 작품 속에는, 정면을 응시하며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올랭피아와 그녀에게로 배달되어진 듯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여자, 그리고 침대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가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자리하고 있다. 배달된 꽃다발을 전해주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흑인 여자의 표정과 마치 귀찮은 듯이 그 꽃을 외면하고 있는 올랭피아의 표정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이 전시되자 평론가와 시인들의 혹평과 빗발치는 야유 때문에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천장 밑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모델의 나체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며, 신화나 우의(寓意)의 베일을 씌우지 않고 거의 초상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들은 비너스 대신 모델이 된 거리의 여인을 보고 파리의 밤의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고 격분하였던 것이다. 살결의 밝은 우윳빛이 또렷한 윤곽에 의해서 검은 배경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효과, 그 평면적 표현의 기법을 평론가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한 지나친 비난은 거꾸로 그가 제시한 표현 기법의 참신함과 근대적인 명쾌함을 일반에게 인상적으로 남겨 작가에 대한 관심을 모으게 하였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  208× 264cm,파리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했다 떨어져 이른바 ‘낙선전’에 걸린 작품이다. 당시 어떤 작품보다 크게 주목을 받아 웬만한 입선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만큼 유명해진 낙선 작이다. 이 작품역시 “어떻게 성장(盛裝)을 한 신사들이 벌건 대낮에 야외에서 창부들과 놀아날 수 있느냐”며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그림속의 여인은 지금 완전히 벌거벗은 채 살짝 구부린 무릎위에 팔꿈치를 얹고 관객을 바라본다.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관객의 그것을 비껴가는 것과 대비된다. 그 만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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